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산 문화 (문단 편집) ==== 흥륭와 문화 ==== B.C.5500~4800[* "씽롱와문화", 《고고학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9157&cid=43065&categoryId=43065]], 2015/09/08 확인.] [[파일:external/www.duguoxue.com/20140810074232854.jpg]] 1980년대 초에 [[랴오허|요하]] 서쪽에서도 압인문 통형관을 특징으로 하는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이 유형을 대표하는 유적으로는 부신시에서 발굴된 사해유적(査海遺蹟)과 적봉시에서 발굴된 흥륭와 유적(興隆窪遺蹟)이 있으며, 이 때문에 사해-흥륭와 문화라고도 일컫는다.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 사해유적 중기에 해당하는 제1호 주거지의 연대는 7040±100BP였으며, 흥륭와 유적 제119호 주거지의 연대는 7240±100BP였다. 그 범위는 북으로 시라무렌 유역, 남으로 대릉하 유역을 포괄하고 난하 유역에까지 이르렀다. 흥륭와 문화의 사람들도 신락문화와 같이 반움집에서 생활하였고, 집들이 규칙적으로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또한 주거지역을 둘러싸고 환호가 구축되어 있어서 본격적인 집단사회(tribe)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해유적의 주거지역 중심부에는 광장이 있고, 이곳에는 유명한 용 모양의 돌무더기와 함께 취락에서 가장 큰 규모인 46호 주거지가 외따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남쪽으로는 무덤군과 갱(坑)이 발견되었는데, 갱 안에서는 많은 규모의 돼지뼈가 발견되어 망자에 대한 제의가 집전되었음을 보여준다.[*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34~241쪽.] 그러나 이것이 [[동북공정|중국 학계]]나 [[환빠|한국 일각]]의 주장처럼 수장사회(chiefdom)[* "군장사회(=수장사회)는 수공업의 전문화와 사회적 위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군장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계층에 의해 일반 사회 성원들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통제와 조절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단계에 도달한 사회에서는 군장을 비롯한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의 권위를 현시하는 특수 유물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며, 일반 성원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들의 생활 공간과 의례 공간을 공간적으로 구분하기 마련이다(오강원,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 『동양학』 제51집, 2012, 단국대학교, 14쪽)."]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주거지를 일정한 형태로 배치하고 중앙 광장에 집회소와 매장장(무덤)를 조성하는 취락 구조는 동시기 중국의 앙소문화에서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20세기에 오세아니아와 남아메리카에서도 조사되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답사한 보로로(Bororo)족 마을은 26가구의 모계사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직업적 전문화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특정 여계 속에서 선출된 족장은 중재와 분배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오강원·홍현선, 『중국고고(선사시대 편)』, 백산자료원, 1997, 116~117쪽; 나카자와 신이치, 『신의 발명』, 동아시아, 2005, 109~200쪽; C. 레비 스트로스, 박옥줄 역, 『슬픈 열대』, 한길사, 2007, 408~425쪽.] 또한 이와 관련하여 주목받은 유물이 바로 [[옥|옥기(玉器)]]이다. 흥륭와 문화에서 출토된 각종 옥기들은 중국 최초의 옥 가공품으로 꼽히는데다, 예로부터 옥은 귀금속으로 취급되었으므로 취락 내에서 소수의 인원이 옥기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양상이 확인된다면 이것이 곧 수장사회 발달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옥을 전문적으로 가공하는 직업이 탄생하고, 사회적 분업화와 위계화가 진전되어 사실상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까지 비약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일:external/pds27.egloos.com/d0112467_55eed1af8b963_m.jpg]] ||<-6> 사해유적 출토 옥기 집계[* 刘赫东·田广林, 「兴隆洼文化查海遗址出土玉器发微」, 『赤峰学院学报』 제35권 1기, 2014, 4~5쪽. 유적 분류에서 F는 건물지(적색), FM은 거실묘(녹색), H는 매납갱(녹색)이다. 바 이후의 숫자는 흥륭와 문화의 2기·3기를 의미하고, 한자는 건물지의 크기가 소형·중형·대형임을 의미한다.] || ||<-2>유적과 분류||옥기||도기||석기||도면상 표시|| ||<|3>F-2小||38||1||11||3||<|2>적색|| ||41||2||7||7|| ||43||3||10||45||적색+녹색|| ||<|3>F-3小||11||1||10||9||<|10>적색|| ||17||1||15||27|| ||20||1||23||12|| ||<|4>F-3中||14||1||22||26|| ||18||1||26||23|| ||27||1||12||47|| ||54||2||15||68|| ||<|3>F-3大||16||1||45||85|| ||36||2||10||55|| ||46||3||43||123|| ||FM-2||43||2||7||2||적색+녹색|| ||FM-3||7||6||15||28||<|2>녹색|| ||H||34||1||5||5|| 사해유적에서 옥기는 주거지의 크기나 다른 유물의 수량과 무관하게 1~3개씩 고르게 소유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옥기를 소유한 이들의 주거지가 그렇지 못한 이들의 주거지와 공간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던 것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이들에게서는 단수 부장된 소량의 옥기를 제외하고는 다른 주거지들과 똑같은 양상으로 생산 활동을 의미하는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오히려 흥륭와 문화 단계에서 직업적 전문화 · 계급적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가 된다. 흥륭와 문화의 주민들은 신락문화와 마찬가지로 어로 · 수렵 · 채집활동에 주로 의존하였으며, 농업은 부수적인 위치에 머물렀다. 유적 내에서는 사슴 · 멧돼지의 뼈가 대량으로 출토되었으며, 뼈를 정교하게 다듬은 작살도 나왔다. 흥륭와 유적 동북쪽에서는 200여 개의 구덩이가 물고기 뼈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 농업과 관련해서는 갈돌과 갈판이 출토되었으나, 극히 개별적인 농작물의 흔적만이 발견되어 과연 농작물의 가공에 사용되었는지 단정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역시 가축의 사육은 보이지 않으며, 뗀석기와 간석기가 함께 출토된다.[*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41~244쪽.] 더불어 종전에는 흥륭와 문화에 선행하는 개념으로 B.C.7500년 정도의 소하서 문화(小河西文化)라는 개념이 제시된 바 있었지만, 소하서 문화는 토기 · 석기 · 골기 · 묘장 · 주거지의 형태가 모두 흥륭와 문화의 것과 일치한다. 더군다나 B.C.7500년이라는 연대도 7470±115BP를 오인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B.C.5500년으로 연대가 내려와 궁극적으로 흥륭와 문화와 합치되게 되었다. 즉 소하서 문화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고, 단지 흥륭와 문화의 지역유형이었을 개연성이 더욱 크다.[* 박진호, 「요서지역 초기 신석기문화 연구 : 소하서·흥륭와문화를 중심으로」, 인하대학교, 2014, 108~115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